방송국 PD? 그때까지는 그러한 직업이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던 나에게 ‘방송국 PD’는 낙인처럼 뇌리에 박혀 버렸다. 무조건 조용필을 만나 방송을 해야 한다는 신념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방송국 PD의 꿈은 청소년 시절을 보내고 대학에 가서도 계속 남았다. 친구들과 소주 한 잔 들이키면서도 조용필 얘기를 하며 PD가 될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오랫동안 그 얘기를 들은 친구들은 어느 순간부터 ‘오 PD'하면서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 하질 않았다.
방송국 PD가 되기 위해 방송국의 문을 두드렸지만, 매번 면접에서 떨어지는 좌절을 겪었다. 몇 번의 좌절은 포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운명은 다른 곳에서 열렸다. 우연찮게 ‘방송 작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하지만 방송이란 분야가 워낙 다양해서 그 속에서 나의 영웅이었던 ‘조용필’을 만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쇼프로그램을 해야 조용필을 만날 수 있는데, 나는 코미디프로그램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래된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작가의 길을 걷고 있던 어느 날, 방송국의 국장과 함께하는 제작팀의 회식자리가 열렸다.
소주와 맥주, 그리고 폭탄주가 오가던 그때, 장기자랑 시간이 되어 조용필의 노래를 멋지게 부르던 나에게 국장이 한마디 건넨다.
“오작가, 노래 잘 하는데. 음악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이번에 쇼 프로그램 맡아 볼래?” 그 말 한마디에 술이 확 깼다. “그럼요! 제가 사실 조용필 씨 때문에 방송국 들어왔습니다. 열심히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매주 한 명씩 당시 최고의 가수를 데리고 한 시간짜리 음악과 토크가 있는 프로그램을 맡게 되었다. 프로그램을 맡고 나서 몇 개월이 지났을 때, 국장님이 어느 날 나를 불렀다. “오작가~ 조용필 씨 좋아한다고 했지? 내일 조용필 씨 하고 약속을 했으니까 집으로 찾아가 봐!”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어린시절 나의 영웅을 만나게 되다니! 나는 믿기지가 않았다. “조용필 씨요?”, “그래, 이번에 조용필 씨 어렵게 섭외했어. 자네가 조용필씨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나? LP판도 다 갖고 있다고 했잖아. 잘 만들어 봐.” 그날 밤 나는 담당 PD와 소주잔을 기울이며 기쁨의 환호를 질렀다. 그때 마신 소주는 정말 최고로 달콤한 맛이었다.
두근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방배동 조용필 씨 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열리고 드디어 어린 시절부터 간직해오던 그 영웅을 만나는 순간이었다.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 영웅에게 두 개의 큐시트를 보여주었다. 하나는 그동안 방송에서 많이 보여주었던 것으로 짠 방송용 큐시트였고, 또 하나는 그동안 방송에서 보여주지 않았던 조용필의 음악으로만 꽉 찬, 즉 나의 영웅을 위한 큐시트였다. 두 개의 큐시트 중 나머지 한 장을 본 영웅이 갑자기 쳐다보며 “나에 대해서 많이 아는구나. 그런데 나도 이걸 하고 싶은데 방송에서는 참 힘들지. 일단 첫 번째 거로 가자!” 사실 그때 나에게는 첫 번째이건 두 번째 큐시트이건 상관이 없었다. 왜냐면 나의 영웅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소중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녹화 당일이 되었다. 오후 6시에 녹화가 시작될 예정인데, 점심부터 녹화장은 위대한 탄생의 연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곳에 바로 영웅이 와 있었으며 무려 6시간의 리허설이 이어졌다. 녹화가 시작되고 2시간동안 영웅의 주옥같은 노래가 스튜디오를 꽉 채웠다.
녹화가 끝난 후, 바라보기만 해도 즐거웠던 영웅과의 짧은 만남을 뒤로 해야 할 그 순간, “녹화도 잘 끝났는데, 그냥 갈 거야? 술 한잔 해야지!” 담당 PD와 나는 영웅과 함께 그의 집 근처인 방배동의 한 술집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여기 소주 두 병하고, 안주는 알죠?” 평소 잘 오던 술집이어선지 주인은 소주 두 병을 갖다 주었고, 그때부터 남자들만의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난 술 중에서 바로 이 투명한 소주를 좋아해. 무엇보다 깨끗하잖아. 특히 녹화나 공연 끝나고 마시는 소주는 정말 맛이 있지.” 그때 나도 한마디 했다. “선생님, 사실 제 몸에는 소주의 피가 흐르고 있어요.” 그때 한 소주 회사의 광고 카피의 ‘진로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인용한 농이었다.
이 말에 기분이 좋았던지 소주잔이 주거니 받거니 지나갔다. 그리고 몇 잔의 소주를 들이켰을 때, 조용필 씨가 말했다.
“오작가야, 나한테 선생님 소리 하지 마. 형이라고 해!”, “네? 형님이요?”, “그래. 선생님 하면 내가 너무 늙어 보여. 형이라고 해. 소주 맛도 더 좋아지잖아.” 영웅과의 만남도 만남이었지만, 소주로 인해 그 영웅을 형님이라 부를 수 있다니 정말 그때처럼 소주가 사랑스럽고 고마웠던 적은 없었다.
남자 셋이 마시다 보니 어느덧 소주 4~5명이 자리에 쌓이고 영웅도 우리도 술기운이 돌던그때, “오작가야, 우리 집에 가서 한 잔 더하자!”라고 영웅이 한마디 또 던졌다. 정말 꿈속을 거니는 순간이었다.
자리를 옮겨 영웅의 집에서 다시 술자리가 벌어졌다. 술자리는 영웅이 음악을 만드는 방에서 이루어졌다.
“난 여기가 참 편해.”하면서 비틀즈 음반을 보여주며 “비틀즈 음악은 언제 들어도 참 좋아.”하면서 자신의 음악보다는 비틀즈 음악과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며 시간을 보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부인 안진현 씨와 비틀즈 음악에 맞춰 부르스도 함께 추는 꿈같은 시간이었다.
그의 집을 나선 시간은 새벽 2시경, 거나하게 취했지만 나는 기쁨에 취해 오늘 밤은 이렇게 잠들 수가 없었다. 영웅 형님과 소주잔을 기울인 역사적인 순간이었던 것이다. 나는 “장PD, 우리 소주 한잔 더 하고 가자!! 투명한 소주 맛을 여기서 끝낼 수는 없잖아!”라고 말하며 소주 한잔을 들이켰다. 1995년 봄날, 소주 한 잔으로 영웅을 형님으로 불렀던 그때의 소주 맛은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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