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한 누구, 예를 들어 김아무개를 만나면 꼭 마시게 되는, 하지만 김아무개를 만나지 않으면 좀처럼 마실 일이 없는 그런 술! 가령 김아무개는 고량주를 정종과 섞어서만 마시고, 이아무개는 보드카를 식혜에 타서만 마신다고 가정해 보자.
이들이 선배를 만날 때라면 몰라도, 후배나 동료들을 만나는 자리라면, 특히 자신이 호스트가 되는 자리라면 ‘고량주 정종 폭탄주’나 ‘보드카 식혜 칵테일’을 남에게도 권할 거다. 그렇게 마시게 되는 술, 그런 술을 ‘아무개주(酒)’라고 불러보자.
누구든, 자기의 인간관계에 따라 알게 된 여러 종류의 ‘아무개주’가 있을 거다. 나도 전에 기자생활을 오래 한 탓에 몇몇 종류의 ‘아무개주’를 기억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니까 이 ‘아무개주’는 사람을 기억하게 하는 강력한 매개항이 된다. 김아무개 하면 김아무개가 마시는 ‘아무개주’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고 할까. 결국 ‘아무개주’는 그걸 만들어 마시는 사람의 스타일이자 캐릭터이며, 그 사람의 아우라이자 카리스마이기도 하다.
내가 아는 ‘아무개주’를 소개하기에 앞서 먼저 양해를 구할 일이 있다. 앞으로 열거할 ‘아무개주’를 만들어 마신 장본인, 그 아무개를 실명으로 밝히지 못한다는 것이다. 술에 관한 글을 쓰고, 술에 관한 다큐멘터리도 만들다보니, 한국 사람들이 가까운 곳에선 술 자랑 하기 예사이지만 막상 공공의 매체에 술꾼으로 소개되는 걸 반기는 경우는 드물다는 걸 알게 됐다. 정치인들도 신문 인물평에 ‘두주불사형’으로 소개되면 좋아하면서도, 카메라를 들이대고 술에 대한 코멘트 한마디 해달라고 하면 거절하기 일쑤다.
이런 문화를 꼭 이중적이라고까지 하기는 뭣해도, 우리 사회가 공(公)적인 곳에선 유달리 더 보수적인, 그러니까 공사를 차별하지 않는 문화적 투명함이 부족한 건 사실인 듯하다. 이 글에서 익명으로 소개할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에 실명으로 등장하는 걸 싫어하지 않을 것 같기도 하지만 확인하기 전에는 최대한 조심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당신이 마시던 술을 당신 실명을 거론하며 써도 되겠습니까?”라며 새삼 전화해 물어보기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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