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은 20명가량 왔는데, 오리 고기를 구워 먹으면서 사이다를 마셨다. 첫 사이다 잔을 부딪치며 모임의 방장이 말하는 건배사가 “많은 사람들이 우리 술 못 마시는 사람들의 애환을 이해하길 바라며, 파이팅!”이었다. 애환? 애환이 왜 없겠나. 한국처럼 술을 자주 마시고, 자주 권하는 나라도 드물 테니 말이다. “술 안 마신다고 직장 상사가 성질내고….” 20대 중반의 한 여자는 이처럼 무작정 술 권하는 사회에 대처하는 비결이 있었다. “먹고 죽으면 그 다음부터는 안 권해요.”
애환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술도 마시지 않으면서 안주빨만 세운다고 뭐라 그러고….” 20대 후반의 한 남자가 흥분하며 말했다. “똑같은 음식인데 왜 옆에 술만 놓으면 안주로 변해야 하냐. 우리처럼 술 못 마시는 사람에겐 술이 있든 없든 그게 음식이고 식사인데. 정말 모든 게 술 마시는 사람들 중심으로만 돌아가는 게 억울하다.” 이 남자는 술이 싫어서 대학 때 엠티 같은 것도 일절 안 갔단다. 나중에 돌아보니 이렇다 할 추억이 없는 게 아쉽기도 하지만 어쩌겠냐고 했다. 이처럼 술을 마시지 않으면 성장 과정도 달라진다.
하지만 어쩌겠나. 사회에선 술 마시는 사람들이 주류, 酒流이자 主流이다. 술 못 마시면 비주류, 非酒流이자 非主流이다. 사회생활 하려면 술 못 마시더라도 술자리에 끼어야 한다.
그래야 세상물정도 익히고, 정보도 교환하고, 사람도 사귄다. 아까 그 친구 말이, 대학시절에 술자리를 멀리 하니까 학창시절에 추억이 없게 됐다고 하지 않던가.
나는 대학 때부터 술 하나는 잘 마셨다. 主流는 아니어도, 항상 酒流였다. 그래서 술 못 마시는 이들의 애환을 잘 모르지만, 주변에 술 못 마시는 이들을 여럿 봤다. 또 그 중 몇몇을 오래도록 봐왔다. 그 관찰의 결과를 추려보면, 술 못 마시는 이들은 대략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가 가능할 것 같다. 첫째, 술을 처음부터 끝까지(20대부터 40~50대까지) 못 마시는 사람. 둘째, 20대에 술을 정말 못 마시다가 가랑비에 옷 젖듯 술이 늘어 40대 넘어 술꾼이 된 사람. 셋째, 못 마시는 술을 억지로 마시다보니 술이 조금 느는 듯했는데 30~40대에 결국 탈이 나서 非主流로 돌아오고 만 사람.
첫 번째 경우에 해당하는 이는, 나보다 나이가 열 살 가량 많은 법조인이다. 검사를 꽤 오래 했는데, 80년대 후반 내가 일간지 검찰 출입 기자를 하면서 알게 됐다. 알다시피 검사들 술 좀 많이 먹나. 특히 검사가 기자와 만났다 하면, 그 시절엔 시작부터 끝까지 주구장창 폭탄주를 마셨다. 그래서 검찰 공보관은 무엇보다 술 잘 마시는 검사를 뽑았다. 그런데 이 술 못 마시는 양반이 공보관이 됐다. 공보관이 돼선, 기자들과의 술자리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그럼 기자들이 봐줄까. 어쩔 수 없는 통과의례, 아까 무주클럽의 20대 중반 여자가 말한 것처럼 그도 ‘먹고 죽었다.’ 그에게 술 먹인 기자들은 조금 뒤 119를 불러야 했다. 그 뒤론 누구도 그에게 술을 권하지 않았다.
그래도 난 신기했다. 술 마시지 않고, 맨 정신에, 술 취한 이들 노는 걸 보고 있으면 한심하고 재미없을 텐데, 그는 함께 술 마시고 취한 사람처럼 잘 어울렸다. 그는 원래부터 직업정신이 투철했다. 보직이 공보관이고, 그걸 잘 하려고 애쓰니까 술 마시지 않고도 그렇게 되는가보다. 언젠가부터, 공보관 그만둔 지 10년도 더 지나서, 그는 술자리에서 자청해서 위스키 한잔, 혹은 폭탄주 한잔을 마시곤 했다. 그리곤 잠시 취기를 즐기는 듯했고, 얼굴이 시뻘게져서 더 이상은 마시지 않았다. 그때 알았다. ‘아! 술을 못 마셔도 취기가 그리울 때가 있겠구나!’
두 번째 유형은 나보다 조금 늦게 언론사에 들어온 후배 언론인이다. 그는 처음 신문사에 들어왔을 때, 그러니까 20대 후반까지도 술을 전혀 못했다. 조금만 마시면 토하고, 그리곤 조금 있다가 뻗어서 잤다.
그런데 이 친구는 워낙 말이 많고 떠들기를 좋아했다. 이 소식, 저 소식 물어다가 동네방네 전하는, 수다스럽기까지 한 친구였다. 당연히 술자리에도 잘 끼었는데, 자기가 싫어하는 이들과는, 술을 못 마신다는 핑계로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게 골라가며 마음 맞는 술자리만 다니다보니 어느덧 술이 친숙해졌는지, 언젠가 보니 소주 두 세잔, 어떨 땐 반병까지도 마시고 있었다. 40대에 들어서더니 웬걸, 자기가 먼저 폭탄주를 만들어 돌리기까지 했다. 술을 늦게 마시기 시작해서 간이 더 싱싱하다고 웅변하듯, 일주일에 서너 번씩 술 마시고 다니는 술꾼이 돼버렸다. 앞에 말한 법조인과는 체질이 달랐던 모양이다.
마지막 유형은 여러 명 있다. 나보다 선배인 만화가도 있고, 대학 교수하는 내 친구도 있다. 이들은 젊은 시절 남에게 지기 싫어서, 혹은 술 마시고 어울리는 그 분위기가 좋아서 악으로 깡으로 술을 마셨다. 만화가의 경우엔, 술이 느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무슨 약까지 지어먹었단다. 그래서 느는 듯했는데, 늘었다 싶은 순간 술 마시고 탈이 나고, 그게 오래 가고, 그런 식으로 한 동안 도돌이표를 돈 뒤엔 술을 멀리 하기로 작정했단다. 교수하는 내 친구는, 30대 중반에 술 마시고 피를 토하고 나선, 몸이 술을 거부하더란다.
앞에 말한 법조인이나, 교수 친구처럼 몇몇 술 못 마시는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표정이 있다. 약간 냉소적인 듯하면서, 어찌 보면 호기심이 가득한 것 같기도 한, 뭐랄까, ‘저것도 재미있다고 하고 앉았나?’와 ‘저러면 재미있을지도 모르겠다’가 반씩 섞인 눈으로 남들을 관찰하곤 한다. 내겐 그 표정이 꽤나 지적으로 보인다. 그렇지. 나도 술 마시지 않고 차분하게 지내다보면, 그처럼 권태와 탐구가 한데 섞인, 매력적인 모습이 나오지 않겠나. 그런데 이틀이 멀다고 흥청망청 마셔대니 도무지 지적인 표정이 나오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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