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못 마시는 사람들의 술 문화
					얼마 전 술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무주클럽’이라는 단체를 취재한 일이 있다. 무주클럽 이 뭐냐고? 無酒! 술이 없다는 뜻으로, 술 못 마시는 사람들끼리‘술 권하는 사회’에 대처하는 노하우나 술 없이 노는 방법 등에 대한 정보도 나누고, 직접 만나서 함께 영화도 보고, 볼링도 치고 하는 모임이다. 인터넷 카페 모임인데, 회원이 600명 가까이 된다고 했다. 열성 회원들의 모임에 카메라를 대동하고 갔다. (문화방송 하이브리드 연작 다큐멘터리‘타임’중 한편‘술에 대하여’로 6월 중 방영 예정이니 많은 시청 바랍니다.^^)

그 날은 20명가량 왔는데, 오리 고기를 구워 먹으면서 사이다를 마셨다. 첫 사이다 잔을 부딪치며 모임의 방장이 말하는 건배사가 “많은 사람들이 우리 술 못 마시는 사람들의 애환을 이해하길 바라며, 파이팅!”이었다. 애환? 애환이 왜 없겠나. 한국처럼 술을 자주 마시고, 자주 권하는 나라도 드물 테니 말이다. “술 안 마신다고 직장 상사가 성질내고….” 20대 중반의 한 여자는 이처럼 무작정 술 권하는 사회에 대처하는 비결이 있었다. “먹고 죽으면 그 다음부터는 안 권해요.”
애환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술도 마시지 않으면서 안주빨만 세운다고 뭐라 그러고….” 20대 후반의 한 남자가 흥분하며 말했다. “똑같은 음식인데 왜 옆에 술만 놓으면 안주로 변해야 하냐. 우리처럼 술 못 마시는 사람에겐 술이 있든 없든 그게 음식이고 식사인데. 정말 모든 게 술 마시는 사람들 중심으로만 돌아가는 게 억울하다.” 이 남자는 술이 싫어서 대학 때 엠티 같은 것도 일절 안 갔단다. 나중에 돌아보니 이렇다 할 추억이 없는 게 아쉽기도 하지만 어쩌겠냐고 했다. 이처럼 술을 마시지 않으면 성장 과정도 달라진다.

하지만 어쩌겠나. 사회에선 술 마시는 사람들이 주류, 酒流이자 主流이다. 술 못 마시면 비주류, 非酒流이자 非主流이다. 사회생활 하려면 술 못 마시더라도 술자리에 끼어야 한다.
그래야 세상물정도 익히고, 정보도 교환하고, 사람도 사귄다. 아까 그 친구 말이, 대학시절에 술자리를 멀리 하니까 학창시절에 추억이 없게 됐다고 하지 않던가.
나는 대학 때부터 술 하나는 잘 마셨다. 主流는 아니어도, 항상 酒流였다. 그래서 술 못 마시는 이들의 애환을 잘 모르지만, 주변에 술 못 마시는 이들을 여럿 봤다. 또 그 중 몇몇을 오래도록 봐왔다. 그 관찰의 결과를 추려보면, 술 못 마시는 이들은 대략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가 가능할 것 같다. 첫째, 술을 처음부터 끝까지(20대부터 40~50대까지) 못 마시는 사람. 둘째, 20대에 술을 정말 못 마시다가 가랑비에 옷 젖듯 술이 늘어 40대 넘어 술꾼이 된 사람. 셋째, 못 마시는 술을 억지로 마시다보니 술이 조금 느는 듯했는데 30~40대에 결국 탈이 나서 非主流로 돌아오고 만 사람.

첫 번째 경우에 해당하는 이는, 나보다 나이가 열 살 가량 많은 법조인이다. 검사를 꽤 오래 했는데, 80년대 후반 내가 일간지 검찰 출입 기자를 하면서 알게 됐다. 알다시피 검사들 술 좀 많이 먹나. 특히 검사가 기자와 만났다 하면, 그 시절엔 시작부터 끝까지 주구장창 폭탄주를 마셨다. 그래서 검찰 공보관은 무엇보다 술 잘 마시는 검사를 뽑았다. 그런데 이 술 못 마시는 양반이 공보관이 됐다. 공보관이 돼선, 기자들과의 술자리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그럼 기자들이 봐줄까. 어쩔 수 없는 통과의례, 아까 무주클럽의 20대 중반 여자가 말한 것처럼 그도 ‘먹고 죽었다.’ 그에게 술 먹인 기자들은 조금 뒤 119를 불러야 했다. 그 뒤론 누구도 그에게 술을 권하지 않았다.
그래도 난 신기했다. 술 마시지 않고, 맨 정신에, 술 취한 이들 노는 걸 보고 있으면 한심하고 재미없을 텐데, 그는 함께 술 마시고 취한 사람처럼 잘 어울렸다. 그는 원래부터 직업정신이 투철했다. 보직이 공보관이고, 그걸 잘 하려고 애쓰니까 술 마시지 않고도 그렇게 되는가보다. 언젠가부터, 공보관 그만둔 지 10년도 더 지나서, 그는 술자리에서 자청해서 위스키 한잔, 혹은 폭탄주 한잔을 마시곤 했다. 그리곤 잠시 취기를 즐기는 듯했고, 얼굴이 시뻘게져서 더 이상은 마시지 않았다. 그때 알았다. ‘아! 술을 못 마셔도 취기가 그리울 때가 있겠구나!’

두 번째 유형은 나보다 조금 늦게 언론사에 들어온 후배 언론인이다. 그는 처음 신문사에 들어왔을 때, 그러니까 20대 후반까지도 술을 전혀 못했다. 조금만 마시면 토하고, 그리곤 조금 있다가 뻗어서 잤다.
그런데 이 친구는 워낙 말이 많고 떠들기를 좋아했다. 이 소식, 저 소식 물어다가 동네방네 전하는, 수다스럽기까지 한 친구였다. 당연히 술자리에도 잘 끼었는데, 자기가 싫어하는 이들과는, 술을 못 마신다는 핑계로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게 골라가며 마음 맞는 술자리만 다니다보니 어느덧 술이 친숙해졌는지, 언젠가 보니 소주 두 세잔, 어떨 땐 반병까지도 마시고 있었다. 40대에 들어서더니 웬걸, 자기가 먼저 폭탄주를 만들어 돌리기까지 했다. 술을 늦게 마시기 시작해서 간이 더 싱싱하다고 웅변하듯, 일주일에 서너 번씩 술 마시고 다니는 술꾼이 돼버렸다. 앞에 말한 법조인과는 체질이 달랐던 모양이다.



마지막 유형은 여러 명 있다. 나보다 선배인 만화가도 있고, 대학 교수하는 내 친구도 있다. 이들은 젊은 시절 남에게 지기 싫어서, 혹은 술 마시고 어울리는 그 분위기가 좋아서 악으로 깡으로 술을 마셨다. 만화가의 경우엔, 술이 느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무슨 약까지 지어먹었단다. 그래서 느는 듯했는데, 늘었다 싶은 순간 술 마시고 탈이 나고, 그게 오래 가고, 그런 식으로 한 동안 도돌이표를 돈 뒤엔 술을 멀리 하기로 작정했단다. 교수하는 내 친구는, 30대 중반에 술 마시고 피를 토하고 나선, 몸이 술을 거부하더란다.

앞에 말한 법조인이나, 교수 친구처럼 몇몇 술 못 마시는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표정이 있다. 약간 냉소적인 듯하면서, 어찌 보면 호기심이 가득한 것 같기도 한, 뭐랄까, ‘저것도 재미있다고 하고 앉았나?’와 ‘저러면 재미있을지도 모르겠다’가 반씩 섞인 눈으로 남들을 관찰하곤 한다. 내겐 그 표정이 꽤나 지적으로 보인다. 그렇지. 나도 술 마시지 않고 차분하게 지내다보면, 그처럼 권태와 탐구가 한데 섞인, 매력적인 모습이 나오지 않겠나. 그런데 이틀이 멀다고 흥청망청 마셔대니 도무지 지적인 표정이 나오기가….

      취중진담/임범의 술과 문화  |  2011. 6. 7.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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