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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술과의 데이트_편의상 내 술친구 둘을 갑, 을이라고 부르자. 갑이 말레이시아로 여행을 갔다. 피부 아토피가 심해 1년에 한두 달 씩, 특히 여름철에 햇볕 뜨거운 남쪽 나라로 가서 온 몸을 태우고 오곤 하는 친구이다. 아토피 뿐이 아니다. 혼자 낯선 곳을 떠돌기 좋아하는 보헤미안 기질도 그의 여행벽을 부추기는 중요한 요인의 하나다. 예년 같으면 그가 어딜 다녀온다고 하면 그런가보다 했는데, 이번엔 다른 친구 을이 바람이 났다. 회사의 중역으로 연봉도 꽤 많이 받고 있음에도, 을은 틈만 나면 회사 다니기 싫다고 노래를 부르곤 했었다.

맑은 바닷물, 아리따운 여인과 술? 쁘렌티안 섬으로!

싱글몰트 위스키

갑이 말레이시아로 떠난 지 보름쯤 지나, 을이 나더러 함께 갑이 있는 곳에 일주일이라도 다녀오자고 했다. 회사 생활이 지겨워서 당장 어디든 다녀오지 않으면 환장할 것 같다고 보챘다. 갑이 간 곳은 말레이시아의 쁘렌티안 섬이었다. 바닷물이 맑기로 세계에서 한두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곳이란다.그럼에도 물가가 한국보다 훨씬 싸단다. 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아리따운 여인들이 놀러와 있단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카카오톡 문자로 갑에게 물었다. “술은?” 답이 왔다. “여기도 싼 술 있는데, 맛있는 술 먹고 싶으면 사가지고 와!” 여행 일정은 7일.(6월 27~ 7월 3일) 출국하면서 인천공항 면세점에 들렀다. 싱글몰트 위스키 좋은 것 하나 사자! 그런데 와!! 2~3년 전만 해도 블렌디드 위스키 일색이던 인천공항 면세점 진열대가 십여 종의 싱글몰트 위스키로 꽉 차 있었다. 스코틀랜드 아일러 섬에서 나오는 아일러 싱글몰트 위스키 중의 한 상표 15년 짜리를 샀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프르에서 비행기 갈아타고 코타바루로 가서, 택시를 타고 코알라베숫으로 가서, 배를 타고 마침내 쁘렌티안 섬에 도착했다. 빅 아일랜드와 스몰 아일랜드, 두 섬으로 이뤄진 그 곳엔 비치가 대여섯 곳 있었다. 우리는 ‘디라군’이라는 비치에 묶었는데 다른 비치보다 크기가 적은 대신 가격도 싸고 분위기가 소박했다. 듣던 대로 물빛은 환상이고, 바닷속 산호와 물고기는 스노클링에 더 없이 좋은 볼거리를 제공했다. 하지만 아리따운 여성이 그리 많진 않았고, 무엇보다 술이 다양하지 않았다. 맥주는 타이 맥주 두 종류와 말레이시아 맥주 한 종류를 팔았고(그것도 세 종류가 항상 있지 않고 한 종류만 있는 날이 많았다), 알코올 도수가 높은 것으로 싸구려 보드카와 ‘아락’이라는 술이 있었다.

소주의 옛 이름을 가진 증류주 ‘아락’

말레이시아의 쁘렌티안 섬 해변

아락? 전에 중동지방에 여행 다녀온 사람이 가져와서 한번 마셔본 술이 ‘아락’이었다. 알코올 도수가 50%를 넘는 증류주로, 색이 투명한데 얼음이나 물을 섞으면 우윳빛으로 변했다. 포도가 주원료인데, 말레이시아의 쁘렌티안 섬 해변. 아니스라는 향신료를 넣어서인지 그 향이 입에 썩 붙지 않았던 기억이 있는 술이다. 아락 말고도 중동, 북아프리카, 남유럽 쪽에선 아니스가 들어간 독주가 많다. 대표적인 게 그리스에서 많이 마시는 ‘우조’라는 술이다.

보드카와 마찬가지로, 100% 가까운 증류 알코올에 아니스를 비롯한 여러 향신료를 섞어 만든 식전주이다. 이것도 색이 투명한데, 물이나 얼음을 넣으면 우윳빛이 된다. 이처럼 투명한 술이 하얗게 변하는 건, 아니스에서 나온 기름이 알코올에는 용해되는데 반해 물에는 용해가 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으로 ‘우조 이펙트’라고 한단다.

그럼 말레이시아 쁘렌티안 섬에서 만난 이 아락도 아니스 향이 섞인 중동 술? 처음엔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무색투명한 게 아니라 위스키 빛이었고, 물을 섞는다고 우윳빛으로 변하는 일도 없었다. 알코올 도수도 25%에 불과했다. 맛? 우리 술로 치면 한산소곡주의 맛이 났는데 한산소곡주보다 덜 달았다. 뒷맛은 흡사 럼주와도 비슷했다. 알아보니, 이름만 같을 뿐 이 아락은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쓰리랑카 등지에서 마시는, 코코넛 밀크가 주원료인 술이었다. 그러고보니 ‘아락’이라는 말은 우리 말 ‘소주’의 원어에 해당하는 아랍어이기도 하다. 오래전에 증류주를, 아랍어를 따서 ‘아락’이라고 불렀고, 그래서 고려시대엔 소주를 ‘아락주’라고 기록한 문건도 나온단다. 이 곳 말레이시아에서도 비슷한 연유로 이 술에 ‘아락’이라는 이름을 붙인 게 아닐까.

백리 밖에선 백리 밖의 술을 마셔라

그 섬에서 파는 아락엔 ‘오랑우탄’이라는 상표가 붙어 있었고, 사람들은 그 술을 ‘멍키 주스’라고 불렀다. 200~250㎖ 한 병에 우리 돈으로 8천원 안팎이었다. 먹기에 큰 부담은 없는데, 그렇다고 또 맛있는 것도 아니어서 처음엔 아락을 마시기보다 내가 공항에서 산 싱글몰트위스키를 마셨다. 스코틀랜드 아일러 섬의 서늘한 해풍 향이 배인 그 위스키를 열대지방에서 마시니까 나름 별미였다. 하긴, 이 낙원 같은 섬에서 무슨 술인들 맛이 없을까. 그러나 한 병으로는 중과부적이었다. 그 위스키는 이틀 만에 동이 났다.

결국 아락을 시켜서 마셨는데, 그 곳엔 라임이 풍부했다. 라임 즙을 짜 넣고 얼음, 설탕을 섞으니, 럼주와 라임주스를 섞은 칵테일 ‘다이키리’와 맛이 거의 같았다. 그렇게 칵테일로 아락을 먹기 시작해서, 결국 이 술이 입에 붙고 말았다. 나중엔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게 라임 섞은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어느 지역, 어느 나라건 많은 사람들이 오래도록 먹어온 음식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듯하다. 외지인이 처음 먹을 땐 역해도 먹다보면 그 맛에 길들여지게 마련이다.


나도 타이의 스프, 똠양꿍을 처음 먹을 때 그랬다. 속에서 올라오는 향이 다음날까지 역하게 느껴졌는데 지금은, 이번 말레이시아 여행에서도 수시로 똠양꿍을 시켜 먹었다. 술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처음엔 그저 그렇던 그 술, 아락이 결국 입에 붙어서 떠나올 때 짐가방만 꽉 차지 않았다면 여러 병 사왔을 거다. 그런데 또 이상한 게, 외국에서 맛있게 마신 술을 한국에 가져와서 마시면 그 맛이 안 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왜 좋은 술은 이사 가지 않는다는 말도 있지 않나. 현지의 술을 마시라는 얘기일 거다. 비슷한 말로 우리 속담에, ‘백리밖 음식(술)은 먹지 말라’는 게 있다. 여기에 하나를 덧붙이면 어떨까. ‘백리 밖에선 백리 밖의 음식(술)을 먹어라’ 라고.

      취중진담/임범의 술과 문화  |  2011. 8. 5.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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