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선희작가 - 해당되는 글 1건

맥주부인 바람났네        어렸을 적부터 막연히 방송국에서 일을 하겠다는 꿈을 꾸곤 했던 내가 작가 생활을 시작한지 벌써 22년이 돼간다. 그러다보니 어디 가서 경력이라도 적어 낼라치면 손댔던 프로그램만 적으려 해도<병팔이랑 갑경이랑><은장도의 한><테마게임><울엄마><이휘재의 인생극장><남자셋 여자셋><여자 대 여자> 등. A4 용지 한 두장으로는 어림 없는(?) 작가가 돼 버린 것이다.
맥주부인과 함께 탄생한 MBC 일일 시트콤‘남자셋 여자셋’

이 길다면 긴 세월동안 나와 함께 했던 변덕쟁이 부인이 있었으니 바로 ‘맥주부인’이다. 먼저 맥주부인 얘길 하기 위해서 잠깐 나의 음주 생활을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내게는 술 때문에 붙여진 몇 개의 별명이 있었다.
‘음주작가’ 일주일 7일 중 5일은 술을 마시던 내가 평균 세 개의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으니 대부분의 대본을 술을 마신 상태에서 썼다고 생각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간혹 의심 많은 몇몇의 인간들이 날더러 집필 작가를 따로 집에 가둬두고 대본을 쓰게 시키고 난 술만 마시러 다니는 음주작가 아니냐고 의심을 한데서 나온 별명이었으니 기가 막히다 참.

‘낮술작가’ 처음 코미디 작가 생활을 시작하면서 신인 작가였던 내게 그 기 센 개그맨들을 상대하기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이미 인기코너의 인기 개그맨들이다보니 하찮은(?) 신인 작가인 내 의견은 항상 뒷전이고 자기들의 아이디어만을 내세우기일쑤였다. 결국 난 회의실 한구석에서 혼자 씩씩대며 앉아 있다 집에 가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미 대학방송국 시절부터 소문난 한 성질로 후배들에게 얼차렷을 밥 먹듯 시켰던 난 그렇게 기죽어 앉아 있을만한 순둥이는 아니었다. 어느 날 난 회의도중 참지 못하고 밖에 나가버렸고, 조용히 소주 한 병을 깡소주로 마시고 돌아왔다. 술만 마시면 얼굴이 홍당무가 되는 내 체질상 내 얼굴은 이미 홍당무였고 온몸에서 술 냄새가 풀~풀~ 풍기는 날 보고 다들 말을 잊은 듯 했다. 결국 에미 애비도 몰라본다는 낮술 덕분에 난 그들 앞에서 할 말 다하고 내 뜻대로 대본을 만들 수 있었지만 그 뒤로 난 이름대신 ‘낮술’로 불리었다.

‘끝장작가’ 성격상 뭐든지 끝을 보는 성격 탓에 오후 네다섯시면 시작되는 술자리는 새벽 네다섯시가 되어야만 끝이 났다. 네가 죽든 내가 죽든 끝장을 볼 때까지 마셔야만 속이 후련해지는 이 나쁜 음주 습관 때문에 참 웃지 못할 일도 많았었다. 모범택시가 처음 나온 날, 기사님이 금이야 옥이야 꾸며서 몰고 나온 택시 안에 첫손님이던 내가 시원하게 구토 장식을 해드려서 기사님의 얼굴을 흙빛으로 만들어 드렸던 일, 완전 꽐라가 돼서 택시 탄다고 눈을 택시 문앞에 대고 문을 열어서 눈탱이 밤탱이 되어서 본의 아니게 눈화장 짙게 하고 다녔던 일, 무엇보다 미안한건 새벽마다 여의도로 강남으로 취한 각시 찾으러 다니느라 고생했던 울 신랑의 모험담까지.
이정도의 닉네임이면 내가 작가생활동안 얼마나 많은 술자리와 유흥문화를 즐겼는지 감히 짐작이 될 것이고, 오늘의 본론은 그 엄청난 술자리에서 절대로 빠지지 않았던 맥주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해볼까 한다.

먼저 왜 맥주 아가씨가 아니고 맥주 부인일까 하는 분들에게 맥주부인을 잠깐 소개할까 한다. 대학 때 소주로 술을 배워서인지 이상하게 난 맥주를 마시지 못했다. 소주는 밤새 마실 수 있었지만 맥주는 500cc만 마셔도 취하는 이상한 현상이 있어서 난 아예 맥주를 입에 잘 대지도 않았다.
그런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작가 생활을 시작하면서 주로 만나게 된 술이 일명, 폭탄주였다. 양주잔을 곱게 품안에 폭~ 싸안고 수줍게 앉아있는 맥주부인.
물론 처음엔 오랫동안 겁내했던 맥주부인인지라 감히 손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데 그 순간 양주군을 품에 안은 맥주부인이 온몸을 유혹적으로 흔들어댔다. 그러곤 하얀 겉옷마저 벗어서 천정에 던져 붙이더니 양주군에 대한 그 사랑의 열정으로 온몸을 떨고 있었다. 그 유혹에 넘어가 온몸을 맥주부인에게 내줘버린 양주군에게 동화되듯 난 양주군을 품은 맥주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 첫잔의 그 느낌을 난 평생 잊을 수가 없다.
‘나 목 타고 넘어가요~ 이제 식도 타고 내려가요~ 나 위장에 도착 했어요’
빈속을 정확하게 훑어 내려가는 그 알싸~한 느낌, 그리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느껴지는 짜릿한 전율. ‘그래, 이 맛이야~’

그렇게 난 양주군을 품은 맥주부인에게 중독되어 갔고 그들의 사랑과 열정을 받아 대본들을 자판기로 찍어내듯 써내곤 했었다. 양주군을 품은 맥주부인들과 함께 썼던 그 대본들 중 가장 대표적인 게 <테마게임>과 <울엄마>부터 시작해서 <귀곡산장> <여자 대 여자> <남자셋 여자셋> 등등. 그 다양한 프로그램만큼이나 맥주부인의 사랑행위도 다양했었다. 때론 양주군을 곱게 품었다가 그 사랑의 열기가 너무 뜨거워지면 활활 타올라 ‘화주’가 되었고, 양주군의 사랑이 식을 듯 약해지면 망설임 없이 ‘충성주’를 바쳤고, 양주군과의 사랑싸움이 심할때는 맥주부인이 입에 거품을 물어 ‘원자 폭탄주’가 되었고, 삐진 맥주부인을 달래주려 양주군이 맥주부인의 옆구리를 푹 찔러댈 땐 ‘수류탄주’가 되었다. 이 중 최고의 뜨거운 사랑을 꼽자면 난 ‘수류탄주’라고 망설임 없이 말한다. 맥주부인의 옆구리를 쿡 찌른 양주군이 그 옆구리로 사정없이 돌진한 후 맥주부인의 뚜껑이 열리는 순가 뿜어져 나오는 그들의 지독한 사랑에는 아마 슈렉도 버티진 못하리라. 나도 수류탄 주에는 가볍게 녹다운 됐었으니. 아, 지금 생각해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음주작가가 사랑한 투명하고 시원한 맥주

그 변화무쌍하고도 열정적인 맥주부인의 사랑 덕에 내 작가 생활 최고의 프로그램으로 꼽는 <테마게임>의 회의는 아예 방송국 대신 술집에서 주로 이루어졌었다.
술집 문을 여는 오후 4시 반까지 우린 회의실에서 신통한 아이디어 하나 없이 시체처럼 축 쳐져 있곤 했었다. 그러다가 술집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쌩쌩해져 사랑에 빠진 맥주부인과 함께 가열찬 음주 회의를 시작한다.

그렇게 가열찬 회의를 마치고 새벽이 돼서야 집에 돌아온 난 이미 다양한 맥주부인에 취해 있게 되고 그 상태로 음주집필을 해놓고 아침 해가 훤히 떠오른 걸 확인하고는 잠이 들곤 했었다. 그렇게 양주군과 사랑에 빠진 맥주부인 덕에 집필한 대본들이 시청률 30%가 넘는 인기 프로그램으로 사랑받고 수많은 유행어들을 낳다 못해 방송작가상까지 받게 해준 걸 보면 맥주부인의 그 사랑이 참 많은 일을 해 낼 수 있는 힘을 준 것 같다.


그렇게 꽤 오랫동안 양주군을 사랑했던 맥주부인이 어느 날 바람이 나버렸다. 양주군 대신 소주군을 품에 안은 것이다. 그 사건은 참으로 순식간에 일어나 버렸다. 그냥 너무 더워서 모두들 맥주나 한잔 하겠다고 호프집에 갔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양주군 없는 맥주부인은 참 김빠져 보였고 외로워 보여서 우두커니 그냥 바라보고 있는데 내 앞에 있던 소주군이 방심해 있는 맥주부인 품으로 순식간에 몸을 던졌다. 난 버럭 화를 냈다.
‘맥주부인은 이미 사랑하는 양주군이 있는데 소주군 너 미친 거 아냐?’
그런데 정작 맥주부인의 반응이 이상했다. 나보다 더 화를 내야할 맥주부인이 조용한 것이다. 아니 오히려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예의 그 유혹의 몸부림을 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맥주부인의 반응에 놀란 내게 맥주부인은 조용히 속삭였다.
‘사랑은 움직이는거야!’

그렇게 기꺼이 소주군을 품은 맥주부인은 일명, 소맥으로 다시 사랑에 빠졌다. 소주군을 품은 맥주부인의 사랑은 훨씬 부드러웠다. 양주군과의 사랑이 젊은 날의 알싸한 열정이었다면 소주군과의 사랑은 부드럽지만 끈끈한 정마저 느껴졌다. 그렇게 소주군과 바람난 맥주부인의 충격으로 나도 역시 살짝 외도를 시도했다. 코미디 작가, 대본 작가라는 내 영역에서 살짝 벗어나 쇼, 버라이어티 구성 작가에 도전해 본 것이다. 토크쇼도 해보고 퀴즈쇼도 해보고 음악쇼도 해봤다. 그 중 가장 신났던 건 음악쇼로의 외도였다.

이정현이 ‘와’라는 노래를 들고 가수로 처음 나왔던 그 해, 내가 했던 음악캠프라는 쇼프로그램에서 이정현을 쇠바구니에 태워 등장 시키다가 로프가 흔들려 위험했던 적도 있었고, 매번 클로징 무대를 장식했었던 HOT를 오프닝 무대에 세웠다가 노래가 끝난 HOT와 함께 방청객들이 다 나가버려서 썰렁한 생방송을 한 적도 있었다. 내가 코미디를 외면하고 다른 프로그램들과 외도하며 그렇게 신나있는 동안 맥주부인 또한 이젠 거칠 거 없는 바람의 달인이 되어 가고 있었다. 모든 일이 처음이 힘들지 두 번째부터는 용감해지기 마련이듯 맥주부인의 바람 역시 양주군을 버리고 소주군을 품을 때의 수줍음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쌀쌀맞은 소주군 대신 달콤한 콜라군을 끌어 들여 ‘고진감래주’를 만들었고, 맥주부인을 못 잊어 찾아온 옛 애인 양주군의 순정도 외면한 채 복분자군을 불러들여 삼각관계를 만든 ‘삼색주’, 아예 포도 오렌지 콜라군들을 몽땅 한곳에 모은 ‘무지개주’로 모두를 현혹 시켰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끝이 있는 법이고 길이 아닌 곳 끝에는 꼭 벼랑이 있기 마련이었다.
맥주부인의 마음이 진심이 아니란 걸 깨달은 그들 역시 맥주부인을 진심으로 대하지 않게 된 것이다. 진심이 아닌 그들의 마음에 상심한 맥주 부인은 모든 걸 버리고 사라져 버렸다. 맥주부인은 어디로 갔을까?

그렇게 맥주부인이 모두의 기억 속에서 조금씩 희미해질 무렵, 맥주 부인이 돌아왔다. 돌아온 맥주부인을 보고 사람들은 기대감과 함께 수군거렸다. 하지만 맥주부인은 이제 더 이상 아무도 품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냥 초심으로 돌아가겠다고. 모두들 반신반의했다. 그 큰 열정과 욕심을 가진 맥주부인이 과연 조용히 초심으로 돌아가 살 수 있을까?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투명하고 시원해 보이는 유리잔 안에 차분하게 담긴 맥주부인은 더 이상 누구를 품지 않아도 그 혼자만으로도 충분히 빛나고 가득차 보였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말했다. 맥주부인이야말로 진정한 바람의 종결자라고. 다른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함으로써 가장 빛나는 맥주부인이야말로 진짜 바람의 달인이라고.

      취중진담/술한잔 소설한편  |  2011. 7. 6.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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