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중진담/술한잔 소설한편

[하이트진로웹진 8월호] 너의 빈 잔 / 임경선

우리곁에 2011. 8. 5. 19:39
너의 빈 잔_그러니까 애초에 결혼식 같은 데를 데려가는 게 아니었다. 하필 석호의 결혼식이 지난 일요일 오후 여섯 시였던 게 화근이었다. 원래 그 시간에는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현아와 늦은 점심을 먹고 그녀의 방에서 사랑을 나누는 게 일상적인 수순이었다.

“왜? 어디 가? 무슨 일 있어?”
요번 일요일에 못 볼 것 같다고 했더니 마누라처럼 현아가 캐물었다. 대학교 1학년부터 캠퍼스 커플로 지내 와서 사학년 무렵엔 다들 ‘박준영 마누라’로 부를 정도이기도 했고 고시생 남자친구에게 ‘다른 스케줄’이 있는 것은 생소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1년도 채 다니지 않은 식품회사 동료였던 석호의 결혼식이 있다고 했다.
“어머, 진짜? 나 잠깐 얘기만 들었던 그 분. 나이도 자기랑 동갑 아냐? 가만… 그런데 어떤 여잔데?”
“나도 얼굴 못 봤어. 사귄 지 얼마 안 된 것 같던데. 여하튼 나 거기 들렸다 너한테 갈 테니까 좀 늦게 보자구.”
“아니, 뭐 그럴 거 있어? 어차피 축의금 낼 건데 그냥 우리 거기서 맛있는 밥 얻어 먹으면 되지 뭐. 돈 굳고 좋네.”
“사람들 북적북적한 데 가서 갈비탕 먹는 게 뭐가 좋냐? 됐어.”
그래도 막무가내로 현아는 나를 따라 오겠다 했다. 내가 오랜만에 자켓을 꺼내 입은 모습에 흡족해하기도 했다.

석호의 결혼식장엔 사람들로 북적북적하지도 않았고 미국산 쇠고기로 만든 갈비탕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사람들은 말없이 조용조용 다녔으며 저마다 원형 테이블에 자리배치가 미리 되어 있었다. 우리 자리에도 <박준영님+동행1>이라는 표식이 되어 있었다. 최근 호텔에 버금가는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실내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프라이빗 웨딩하우스였다. 김석호의 핏기 없는 얼굴과 대충 차려입은 옷매무새를 보았을 때 집안이 재산가였음은 상상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고기 써는 분위기네.”
내가 냅킨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응.”
시골에서 서울 갓 올라온 순정처녀마냥 현아는 천장의 샹들리에와 흰색 꽃장식의 버진로드를 넋을 놓고 쳐다보고 있었다.
“젠장, 끝날 때까지 자리에 꼼짝 말고 앉아 있어야 되겠네.”
“어.”
현아의 언동은 순간 양가집 규수의 그것으로 바뀌어져가고 있었다. 어라, 오늘 커플링도 끼고 왔네. 나는 테이블 위의 현아의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자기야, 이거 테이블 위의 맥주 먼저 마셔도 되는 거야?”
현아가 손을 슬며시 빼며 내게 물었다.

“속도위반이라더라.”
그로부터 일주일 지난 장마시즌의 첫날, 현아의 원룸에서 우리는 침대에 누워 창밖에 비가 떨어지는 소리를 멍하니 감상하고 있었다.
“뭐가?”
“그, 왜, 김석호씨네 말야.”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여자화장실 가서 아주머님들 수근대는 소리를 엿들었어. 참 우아하게 생기셔갖구선… 아 정확한 표현은 ‘특별혼수품을 장만했다’나 뭐라나.”
“그랬구나, 그건 나도 몰랐네. 녀석이 원래 숫기가 없으니 그런 얘기도 안 했구나.”
몸의 피곤이 덜 풀려 다시 눈을 감고 현아에게 등을 돌리며 짧은 낮잠을 청하려고 했다.
“그래도 사랑하나 보네. 도망 안 가는 걸 보니.” 현아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어깨 너머로 들렸다.

동갑여자와 사귀는 기분은 참 묘했다. 나와 같은 세대, 나와 같은 세월을 함께 관통해가는 게 분명한 데 어째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점점 격차가 커져갔다. 나는 졸업 후 군대를 다녀오고 현아는 졸업 후 영어학원 강사가 되었다. 그녀는 타고난 싹싹함과 영민함 덕에 원장과 학부형들한테 큰 인기를 끌었다. 원장은 겨우 이년 후, 현아의 가능성을 눈여겨보고 서울시내 외곽에 새로 만드는 3호점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이른바 ‘새끼마담’ 같은 개념인데, 웬걸. 기대 이상으로 3호점은 번창을 해갔다. 워낙 외딴 지역이라 주변에 다른 경쟁자가 없었고 그 동네 엄마들은 달리 여흥거리가 없어서 오히려 아이들 교육에 올인하는 분위기였다. 가끔 현아가 일반 회사를 다녔다면 어땠을까 싶다. 그녀는 원래부터 에너지도 넘치는 아이였는데 분명히 일반 회사를 다녔다면 남자 상사들도 이뻐했겠지만 주변에 집적거리는 남자 여럿 생겼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현아가 더 적극적으로 반응할지도 모른다. 그런 끼를 내재한 현아가 이름도 모를 동네에서 아이들과 엄마들만 상대하는 지루한 직업을 택한 것에 대해 남자 친구로서는 처음엔 내심 안도했음을 부인하진 못했다. 그런데 때로는 그 기를 다 못 펴고 사는 것 같아 그 스트레스는 고스란히 내게 옮아와 부담스럽기도 했다.
“뭔가 엄마와 아이들의 기에 눌려 내 인생도 팍팍 늙어가는 기분이야. 나 고작 28살인데. 너무 재미없어. 사는 게. 이대로 매일매일 똑같이 살다가 죽을 것만 같아.”
어느덧 불평불만은 근본 원인은 같아도 해석이 달라졌다.
“글쎄, 나 벌써 28살인 거 있지?”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더 큰 한숨을 내쉬며.

변명을 하자면 평소에 내가 가지던 결혼관이라는 것은 이랬다. 남자가 번듯한 직장을 잡아 돈을 모으고 집도 사고 착실하게 준비해서 좋은 여자 만나 주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하는 것이 결혼이라고. 좋은 여자를 너무 일찍 만나버린 게 스케줄을 다 꼬이게 한 원흉이었을까? 뽑아주는 회사 아무 데나 들어갔더니 역시 상사라고 하는 작자들이 워낙 개차반 같아 그 꼴을 못 보고 한번 들이받는 통에 회사를 관두고 신림동에 들어왔다. 그리고 어느덧 내 마음 속의 결혼적령기는 35살이 되었다. 아니, 실은 점점 ‘뭐 굳이 결혼을 하지 않아도 인생 사는데 별 불편함은 없지 않을까’가 내 본심이 아닐까도 싶었다. 이렇게 내 본심이 정확히 뭔지도 스스로도 헷갈려서 짜증날 무렵, 현아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말문을 꺼냈다.

“우리 술 먹으러 가자.”
“뭐?”
“술 먹으러 가자고. 나 술 먹고 싶어. 술 사줘. 술고파”
“….”
“어서.”
현아는 내 엉덩이를 손으로 찰싹 때렸다. 현아가 나를 데려간 곳은 주로 삼겹살이나 목살이 인기메뉴인 동네 고깃집이었다. 현아의 비장한 분위기상 어딘가 비싼 곳에 가서 비싼 밥을 먹어줘야 직성이 풀릴 것 같이 보였는데 의외의 선택이었다. 대신 그 중 제일 비싼 소갈빗살을 시켰다.

현아와 술자리로 마주하는 일은 대개 뭔가 무거운 얘기를 꺼낼 때만 그렇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긴장하기 시작했다. 태연한 척 사이다를 시켰다. 나는 선천적으로 술을 거의 마시지 못했다.
“같이 마셔.” 현아는 소주잔 하나를 내 앞에 놓았다.
“지난번처럼 나 쓰러져서 네가 나 업고 가려고?”
“그러던가.”
종업원이 건네준 소주병의 뚜껑을 열고 두 개의 잔에 거칠게 부으며 그녀는 씁쓸하게 내뱉았다.
“참, 어쩌자고 술을 입에도 못 대는 남자가 이리도 좋을까.”
애주가인 현아는 내게 술잔을 부딪혀왔다. 현아는 반쯤 들이키고 잔을 테이블 위에 탁 놓았다.
“나… 지금 학원 꽤 잘 된다.”
“알지. 너 좀 유능하잖아.” 나는 양파를 쌈장에 찍어먹으며 끄덕끄덕거렸다.
“그래 솔직히 우리 대학 같은 델 나와서 28살 되서 나만큼 돈 잘 버는 여자 있음 나와보라 그래.”
피식, 그 말에 웃음이 새나왔다. 학원이 어느 정도 자리 잡히고 모아놓은 돈도 좀 되는 걸로 알고 익히 알고 있었다. 현아는 늘 뭔가 기분이 석연치 않을 때 자기가 얼마나 또래들에 비해 많이 버는지를 강조해야 직성이 풀렸으니까. 그럴 때마다 난 이 나이 되도록 부모한테 용돈 받아쓰는 한심한 백수임을 또 한번 자각하게 된다.
“그러니까… 내가 가진 걸로 일단 시작하면 될 것 같다구.”

우리가 ‘결혼’이라는 단어를 두 사람 입에 가장 많이 올렸던 때는 내가 군대 가기 전의 대학교 4학년 때였다. 마치 밀레니엄을 맞이하는 사람들처럼, 우리 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헤어지지 않을 거야,라며 굳게 맹세를 했고 처음 수줍게 ‘결혼’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며 우리는 뜨겁게 환희의 절정을 함께 맛보았었다. 그 때 어쩌면 이미 관계의 피날레를 장식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결혼을 하게 되면 네가 분명히 행복하지 않을 거야.”
이런 상황, 즉 ‘내’ 상황 말이다. 그리고 ‘너’가 아닌 ‘내’가 행복하지 않을 거야,가 정직할 것이다.
“나는 네가 무슨 얘기를 하든 이젠 그냥 그 모든 얘기들이 나랑 결혼하기 싫다는 표현으로만 들리는데… 어떡하지?”
현아가 슬픈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남은 잔을 일제히 들이켰다. 때마침 종업원이 갈빗살 2인분 접시와 숯불을 낑낑대며 가지고 왔다. 확 테이블에 불이 오르자 현아의 얼굴도 덩달아 벌개져갔다. 언뜻 그것은 화난 암사자의 모습 같았다. 그리고는 그 모습 그대로 이내 남편이 주는 실망에 익숙하게 체념한 마누라처럼 현아는 척척 고기들을 불 판 위에 올려놓고 힘차게 굽기 시작했다.
“일단 먹자. 일단 먹자고”
그녀의 빈 잔을 지금 가득 따라주는 것 말고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생각해보면 난 현아의 빈 잔을 늘 한 템포 늦게 알아차렸던 것 같다.

필자소개:임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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